안녕하세요^^
오늘은 앞서 잠시 언급한 구텐베르크의 이야기와 그 발명품의 뒷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활판술(typhography)은 석자공이 원하는 대로 금속 활자들을 하나하나 만들어 조합할수 있는 방식입니다. 단단한 금속에 글자를 새긴뒤 조금 덜 단단한 구리에 글자가 움푹 패이게 찍어낸다음 납과 주석, 안티몬 합금을 넣은 틀에 넣습니다. 이렇게 해서 동일한 크기로 자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 활자들로 인쇄된 지면은 깔끔하고 정교했습니다. 두가지의 중요한 기법을 보완, 수정해서 만들었습니다. 하나는 인쇄기 원리의 도입입니다. 또 하나는 필경사가 사용했던 것보다 덜 유동적인 잉크 제조방식 이였습니다. 이렇게 여러 방법을 수정하 보완하여 만든 인쇄기술은 15년의 연구 기간과 엄청나게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한 천재의 피나는 노력으로 발명 되었습니다. 한국은 14세기 부터, 중국은 그보다 조금뒤 부터 활판술(typhography)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목판술 만큼 전파 되지는 못했습니다. 유럽도 마찬가지로 구텐베르크만이 인쇄 연구에 착수했던 유일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16세기부터 발명의 영광을 자국으로 돌리려던 애국적인 역사가 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구텐베르크의 연구를 도용해 왔던 네덜란드의 하를렘 라우렌스 얀존 코스터는 기초를 확립하지는 못했습니다. 고문서에 따르면 금은세공사인 프로코프 발드보겔은 당시 금속소재를 이용해 인위적은 기술방식을 가르치고 있었다고 했는데, 그가 제작한 것 중 보존된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구텐베르크에 대한 정보가 많지는 않습니다. 그에 대한 대다수 의혹을 품은 수많은 연구 논문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가 이룬 성과는 국제적으로 인정 되었고, 많은 다른 시기의 작업물들이 아직도 보존되어 있다. 구텐베르크의 초상화가 한점도 나온게 없다는것이 그에 대한 수수께기를 가중시켰습니다. 19세기에 흔했던 판화에서 구텐베르크는 수염을 기르고 모자를 써서 나이든 모습이 알려졌습니다. 구텐베르크는 14세기말, 작은 교역도시인 마인츠의 금은세공사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경제적으로도 매우 활기찬 도시였습니다. 그는 스트라스부르에서 작업했던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새로운기술과 관련하여 은밀한 연구들을 꾸준히 해오면서 정확한 인쇄의 실현을 위해 인쇄기와 판형들, 활자등 도구를 사용했습니다. 찍어내를 위한 도구들 이였습니다. 그러나 1459년 이전까지 스트라스부르에서 인쇄된 작품은 없었습니다. 이러한 실패를 발판 삼어 구텐베르크는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바로 성서의 인쇄였습니다. 막대한 자본가인 요한 푸스트란 인물을 만나 투자를 받았습니다. 1449-1450에는 도구를 제작하고, 이후에는 종이나 양피지, 잉크 구입, 급여지급 등 경비를 청구 했습니다. 요한 푸스트는 재정 이외의 일도 참여했으며, 발명에 역점을 두고 페터 쇠퍼도 개입을 했습니다. 처음 인쇄된 것으로 알려진 '42행 성서'는 쪽행수가 책이름으로 붙여진 것인데 1455년 정도에 인쇄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당시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비서는 교황 특사인 피콜로미니 주교에게 보내는 편지에 프랑크푸르트에서 성서 묶음들을 엄청나게 많은 견본들로 나눠서 판매하고 있는 '놀라운 인물'을 우연히 만나게 된 계기를 적어놨는데 아마 이 위인이 구텐베르크가 아닐까 하고 추정 하고 있습니다.
정확한 개수 파악을 해볼수 없지만 그의 성서는 불티나게 팔렸을 것입니다. 수입이 투자액을 맞추지 못하였고 투자한 금액만 늘어났습니다. 구텐베르크와 계약을 파기한 이유도 이것 때문이였을 것입니다. 1455년말에 쇠퍼는 자신이 말한 총액을 발명가가 지불못하게 되어 그와 각자의 길을 가기로 한것입니다. 푸스트는 쇠퍼와 손잡고 발명품을 이용해 인쇄한 사람의 이름와 날짜를 적어 인쇄한 최초의 작품으로 '마인츠의 시편'을 출간했습니다. 그후로 30개의 책을 모두 함께 제작 했습니다. 혼자 남겨진 구텐베르크는 다른 돌파구로 수요가 많은 면죄부 서식을 인쇄하고 '42행 성서' 후속인 '36행 성서'를 인쇄했습니다.
동업자들의 연 새 작업장도 그렇고 구텐베르크의 발명은 만천하에 공개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학가나 수도원내 서점들이 최초로 인쇄된 책들을 판매하게 되자 이분야에서 뒤떨어져 있던 파리와 같은 주요 도시들도 인쇄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시장성이 무한할것이라는 직감하면서 직업에 대한 소명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인쇄술은 점점 더 번져 갔는데 구텐베르크의 옛동료 들이 한몫을 했습니다. 수량이 아주 적었으나 인쇄도구를 들고 아주 멀리 있는 나라까지 동업자를 찾아 나섰습니다. 가장 명백한 예로서 구텐베르크 직공 이였던 요한 노이마이스터는 이탈리아로 건너갔습니다. 그는 인쇄물을 제작할 장소에 따라 여정을 변경시키며 작업을 했습니다. 그가 첫 발간한 작품은 단테의 작품들 이였습니다.
그후 1472년 요한 파릭스는 세고비아에 활판 작업장을 열었습니다. 다음에는 발렌시아와 사라고사 차례로 작업장을 열었으며, 유럽전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유럽의 110개가 넘는 도시들에 이미 작업장들이 넘쳐났습니다. 인쇄술이 제작된 시키에 절정으로 올라갔던 목판 인쇄술들은 발달 속도만큼 빠르게 사라져갔습니다. 인쇄술이 처음에는 도시 중심으로 성장을 하였지만 다른 도시나 지방의 인쇄사업장이 생기기도 전에 책이 도착해서 판매 되었는데. 이는 서적상들이 도시 밖으로 가제본을 유포시켜 유통했기 때문입니다. 인쇄술의 발명은 비약적이였지만 책의 형태 관점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본 부분도 거의 기존과 동일하게 진행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필사본과 책이 구분되는 부분에서는 확실히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은 인정해야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이야기 하고 다음에는 다시 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